1.21 사태 오소리 작전 실미도 사건 꼬꼬무2 버스 난동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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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1.21 사태 오소리 작전 실미도 사건 꼬꼬무2 버스 난동사건

by 두두스토리 2021.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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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21 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1968년 4월 1일 북한 침투작전을 위해 창설된 실미도 부대에서 3년 4개월 동안 훈련을 받아 오던 공작원 24명이 1971년 8월 23일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하여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군·경과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 민간인, 공작원 등 28명이 사망하고, 이후 생존 공작원 4명이 사형 집행되었습니다.

 

1.21 사태


북한은 1968년 특수요원 31명을 침투시켜 청와대 기습을 시도했습니다.

이 사건은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휴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 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는 한편,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살상당하였다.
군 ·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하여 29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였다. 나머지 1명은 북한으로 도주하였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그날 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총경 최규식(崔圭植)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하였다. 그날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金新朝)는 그동안 김일성의 허위선전에 속아 살아왔음을 깨닫고 한국으로 귀순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다.


오소리 작전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 정찰국 소속인 124 군부대 무장 게릴라 김신조 등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해 박정희 암살을 기도한 사건을 발생하면서 이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박정희 정권의 지시 아래 김일성 암살을 목적으로 몇 개의 북파공작원 부대가 창설되었습니다.

이 중 하나가 공군 산하의 실미도 684부대로 '김일성 암살'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북파공작원을 양성시키기 위한 특수 부대입니다.

버스 난동사건이 있기 약 3년 전, 미지의 장소로 청년 31명이 모였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국가기밀이었고 그들의 존재도 국가기밀로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 은밀한 작전이 시작됐습니다. 면회도 외출도 불가한 편지 한 통 쓸 수 없는 고립된 그곳에서 청년들은 실탄이 날아다니는 극한 훈련을 받게 됩니다. 훈련을 받다 부상을 입거나 사망을 하게 돼도 가족들의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초엔 훈련을 마친 후 실전 투입되어 보복작전을 완수하려는 계획이었으나, 1970년대 초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북파 임무는 취소되었습니다.

작전이 취소되자 국가의 관심이 떨어지고 이후 아무 기약없이 몇 년째 대기만 하고 있고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제대로 챙겨주지 않고 그저 내팽개쳐진 신세가 되자, 기간병과 훈련병 간 다툼도 일어나게 되는데 이곳에선 다툼이 일어나면 즉각 처분으로 동료들의 매질로 죽어 나가게 됩니다. 매질을 거부하면 자신의 생사도 위험하기에 그들은 그곳의 룰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3개월에서 길어지면 6개월 안에 훈련이 끝난다는 말을 들었던 훈련병들이 이곳에 머문 지도 어느덧 3년이 흘러가며 분노를 참지 못하게 됩니다.

 

버스난동 사건(실미도 사건)


실미도 사건은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경 혹독한 훈련과 열악한 보급 및 보수 미지급에 불만을 품은 실미도 공작원 24명이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총과 실탄을 챙겨 실미도를 탈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12시 20분경 인천 독배 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하던 중 인천에서 육군과 최초의 총격전을 벌인 후 두 번째 버스를 탈취해 오후 2시 15분경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들은 저지하는 군·경과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부대원 대부분이 사망하였습니다.

군·경과 실미도 공작원들과의 교전 결과, 경찰 2명과 민간인 6명, 그리고 공작원 20명이 사망하고, 생존 공작원 4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972년 3월 10일 사형 집행되었습니다.


실미도 사건 이후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북한 무장간첩이 서울에 침입해 군인들 간의 교전 끝에 사살했다는 북한 소행의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발표하였습니다.

해당 부대의 훈련병들은 군인이 아닌 사형수와 흉악범 등 전과자 위주로 구성된 것이라고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실미도 684 부대 창설 멤버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방일 소대장은 이후로도 공군에서 계속 복무했으며, 준위까지 진급하고 1990년 퇴역하였습니다.

이후 유일기업의 대표로 살다가 684 부대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영화 실미도도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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